서른아홉 살 프리랜서 디자이너 박모씨는 매달 들어오는 돈은 나쁘지 않았지만 은퇴 후를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회사원 친구들이 퇴직연금 얘기를 할 때마다 남의 일처럼 흘려들었다. 그러다 마흔을 앞두고 우연히 세금 상담을 받다가 개인 퇴직연금 계좌를 처음 알게 됐다.
(위 사례는 다수 상담 사례를 재구성한 것으로 특정 개인을 지칭하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이었나
박씨는 10년 넘게 프리랜서로 일해왔다. 4대 보험 중 국민연금은 지역가입자로 납부하고 있었지만, 회사원이라면 당연히 쌓이는 퇴직연금(회사가 근로자를 위해 적립·운용하는 은퇴 자금 제도)은 애초에 대상이 아니었다.
동창 모임에서 회사원 친구가 퇴직연금 잔고를 보여주며 이직할 때 계좌를 그대로 옮겼다는 얘기를 듣고서야 자신에게는 국민연금 하나뿐이라는 사실이 새삼 크게 느껴졌다. 노후에 국민연금만으로 생활비를 전부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프리랜서나 자영업자는 매달 들어오는 돈에 신경 쓰느라 은퇴 이후를 미뤄두기 쉽다는 말에 박씨도 크게 공감했다. 당장의 소득에만 집중하다 보면 정작 소득이 끊기는 시기를 준비할 여유는 뒷전으로 밀리기 마련이었다.
주변에 물어보니 프리랜서나 자영업자도 개인형 퇴직연금(IRP) 계좌를 스스로 만들 수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회사가 대신 넣어주는 돈이 없으니 전부 본인 돈으로 채워야 한다는 점이 걸렸지만, 노후 자금을 강제로라도 묶어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입은 이렇게 진행했다
박씨는 은행 두 곳과 증권사 한 곳의 상담을 받아봤다. 상품 구조는 비슷했지만 운용 가능한 펀드 종류와 수수료 체계가 달라서 비교하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비대면으로 계좌를 열 수 있다는 안내를 받았지만, 처음 만드는 계좌라 영업점을 직접 찾아가 서류를 확인받고 진행했다. 신분증과 소득 관련 서류를 준비하고, 운용 방식을 원리금보장형으로 할지 펀드 등 실적배당형으로 나눠 담을지 상담사와 함께 정했다.
계좌를 개설한 뒤에는 매달 일정 금액을 자동이체로 넣기로 했다. 처음에는 여유자금으로만 채우려 했는데, 담당 상담사가 세액공제(낸 세금 중 일부를 돌려받는 것) 한도를 챙기는 게 유리하다고 알려줘서 납입액을 다시 조정했다.
몰랐던 것·헷갈렸던 것
가장 헷갈렸던 부분은 중도인출이었다. 급하게 돈이 필요해도 정해진 사유 없이는 계좌에서 꺼내 쓸 수 없다는 걸 가입 후에야 제대로 이해했다.
연금저축과 IRP를 같은 것으로 착각한 것도 뒤늦게 바로잡은 부분이다. 두 계좌 모두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지만 가입 대상과 운용 제한, 담을 수 있는 상품 범위가 조금씩 달랐다.
세액공제 한도도 마찬가지였다. 무작정 많이 넣는다고 전부 공제받는 게 아니라 연간 납입 한도가 정해져 있었고, 한도를 넘긴 금액은 공제 없이 계좌에 묶이기만 했다. 55세 이전에 목돈이 필요해질 수 있다는 점도 뒤늦게 고민거리로 떠올랐다.
전문가라면 이렇게 조언합니다
퇴직연금 상담을 오래 해온 설계사들은 소득 형태부터 따져보라고 말한다. 근로소득자는 회사가 운영하는 퇴직연금 위에 개인 계좌를 얹는 구조이고, 자영업자나 프리랜서는 처음부터 전부 스스로 채워야 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국민연금과 퇴직연금, 개인연금을 흔히 노후 소득의 세 기둥이라고 부른다. 이 중 하나라도 비어 있으면 나머지 두 개로 부족한 부분을 메워야 하는데, 프리랜서나 자영업자는 두 번째 기둥이 애초에 없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또한 당장의 생활자금과 완전히 분리된 여윳돈으로 납입액을 정하라고 권한다. 중도인출 요건이 까다로운 만큼, 몇 년 안에 쓸 계획이 있는 돈을 넣으면 오히려 발이 묶일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세액공제 혜택은 매력적이지만 그것만 보고 무리하게 납입액을 늘리는 것도 권하지 않는다고 한다.
계좌를 개설하기 전에 운용 가능한 상품 종류와 수수료 구조를 상품설명서로 미리 확인해보는 것도 권장된다. 같은 개인 퇴직연금이라도 취급 기관마다 담을 수 있는 펀드와 비용이 달라서 나중에 갈아타려면 번거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소득이 들쭉날쭉한 자영업자라면 매달 고정 금액보다 여유가 있을 때 추가 납입하는 방식으로 유연하게 운영하는 편이 부담을 덜 수 있다는 조언도 있다.
박씨는 지금도 매달 같은 날 자동이체가 빠져나가는 걸 보면서 진작 알았으면 더 빨리 시작했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개인 퇴직연금은 누가 대신 챙겨주지 않는 만큼, 본인 소득 구조를 먼저 파악하고 시작하는 게 첫걸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