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과장(40대 후반)은 이직을 두 번 거치는 동안 퇴직연금 계좌를 세 번 옮겼다. 회사마다 확정기여형(DC형, 회사가 매년 정해진 금액을 내 계좌에 넣어주고 운용은 내가 직접 결정하는 방식) 퇴직연금을 채택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계좌를 옮길 때마다 상품 구성을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위 사례는 다수 상담 사례를 재구성한 것으로 특정 개인을 지칭하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이었나
첫 직장에서 가입한 DC형 계좌는 은행 정기예금형 상품에 자동으로 담겨 있었다. 담당자가 "일단 안전한 걸로 넣어드렸다"고 안내했고, 김 과장은 그 말을 그대로 믿었다. 이후 몇 년간 급여명세서에 적립금 항목만 확인했을 뿐, 운용 상품이 무엇인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
7년 뒤 잔고를 확인해보니 원금은 늘었지만 물가 상승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는 걸 알게 됐다. 같은 기간 동료 몇몇이 실적배당형 상품을 일부 섞어 운용한 계좌와 비교하니 격차가 눈에 띄게 벌어져 있었다. 김 과장은 그제야 계좌를 방치해온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가입은 이렇게 진행했다
퇴직연금 담당 부서에 문의하자 "운용지시를 한 번도 넣지 않으면 기존 상품이 그대로 유지된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직 때마다 개인형퇴직연금(IRP, 퇴직금을 회사가 아닌 개인이 직접 관리하도록 만든 계좌)으로 이전했지만, 이전 후에도 운용 지시는 자동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김 과장은 처음으로 온라인 시스템에 접속해 상품 구성을 직접 조정했다. 예금형 비중을 낮추고 채권형과 혼합형 상품을 나눠 담는 방식으로 운용지시를 새로 넣었다. 상품설명서를 하나하나 열어보는 데만 반나절이 걸렸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사전지정운용제도(디폴트옵션, 운용지시를 하지 않을 경우 미리 정해둔 상품으로 자동 운용되도록 하는 제도)라는 이름을 처음 접했다. 신청해두면 방치 기간에도 최소한의 리밸런싱이 이뤄진다는 설명을 들었다. 다만 신청 여부와 상품 구성은 본인이 직접 선택해야 적용된다는 점도 함께 안내받았다.
몰랐던 것, 헷갈렸던 것
가장 헷갈렸던 부분은 확정급여형(DB형, 회사가 퇴직 시점 급여를 기준으로 미리 정해진 금액을 지급하는 방식)과의 차이였다. DB형은 운용 책임이 회사에 있고, DC형은 운용 책임이 근로자 본인에게 있다는 구조 차이를 뒤늦게 이해했다. 두 방식 중 어느 쪽이 유리한지는 근속 기간과 임금 상승률에 따라 달라진다는 설명도 들었다.
수수료 항목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상품별로 운용보수와 사업비 체계가 다르다는 사실을, 이번에 상품설명서를 하나씩 읽어보고서야 알았다. 같은 유형 상품이라도 보수 차이가 누적되면 장기적으로 무시하기 어려운 규모가 될 수 있다는 점도 새로 알게 됐다.
또 하나는 원리금보장형이라고 해서 손실 위험이 전혀 없는 건 아니라는 점이었다. 다만 예금자보호 한도나 상품 구조에 따라 보장 범위가 달라질 수 있다는 걸 담당자에게 다시 확인해야 했다. 운용 지시서에 적힌 상품명만으로는 구조를 다 파악하기 어려워, 약관을 함께 요청해서 봤다고 한다.
전문가라면 이렇게 조언합니다
퇴직연금 운용은 가입 시점 한 번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는 게 공통된 조언이다. 최소 1년에 한 번은 잔고 구성과 수익률 추이를 점검하는 습관이 필요하다. 이직이나 전직 시점에는 특히 운용지시가 새로 필요한지부터 확인하는 게 우선이다.
연령대가 낮을수록 위험자산 비중을 상대적으로 높게, 은퇴가 가까울수록 안전자산 비중을 늘리는 생애주기형 배분이 일반적으로 권장된다. 특정 상품 하나에 몰아넣기보다 예금형·채권형·주식형을 목적에 맞게 나누는 구조가 기본이다. 배분 비율은 개인의 은퇴 시점과 다른 자산 현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 일률적으로 정하기보다 정기적으로 재검토하는 편이 안전하다.
사전지정운용제도를 신청해두면 아무 조치를 하지 않는 기간에도 방치로 인한 손실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 제도가 수익을 보장하는 건 아니므로, 정기 점검을 대체할 수는 없다는 점은 분명히 짚어둘 필요가 있다.
결론
퇴직연금은 가입만 해두면 알아서 굴러가는 상품이 아니었다. 계좌를 열어보는 습관 하나가 수십 년 뒤 노후 자금의 크기를 바꿀 수 있다는 걸, 김 과장은 뒤늦게 체감했다.